‘새벽을 여는 강연'은 "좋은 사람이 좋은 세상을 만듭니다"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있는 한국인간개발연구원(KHDI)의 조찬강연을 지상중계하는 코너입니다. KHDI가 지난 33년 동안 매주 목요일 오전 7시에 1541회(금주 기준)나 진행해 온 조찬강연은 국내 최다 회수를 기록하며 최고 권위의 강연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지난 3월 20일 롯데호텔 2층 에메랄드룸에서 박종호 풍월당 대표가 ‘인간의 지혜가 만든 최고의 예술 오페라 이야기’라는 주제로 강연한 내용을 정리한 이 기사가 독자들의 교양 쌓기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편집자주)

"가장 매력적인 예술 오페라에 빠져라"

“인간이 400년 동안 자신들의 머리와 가슴을 다 쥐어짜서 만들어낸 오페라는 지적인 향취와 세속적인 재미를 모두 다 갖춘 매력적인 예술이다.”

<박종호에게 오페라를 묻다>의 저자 박종호 풍월당 대표(박종호정신과의원 원장)는 오페라를 그렇게 규정했다. ‘당신이 오페라에 대해 궁금해 하는 모든 것’이라는 부제가 달린 이 책에 따르면, 박 대표는 세계 유수의 오페라하우스들을 섭렵하면서 직접 본 공연만도 500여편에 이를 뿐만 아니라 국내 최초의 클래식 전문 음반매장 ‘풍월당’을 설립한 인물이다.

“인간이 최초로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부른 것이 언제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반면에 오페라는 영화와 더불어 분명하게 생일(生日)이 있는 장르이다. 실제로 1600년경의 어느 날,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오페라가 만들어졌다. 사람들은 1597년에 만들어진 야코포 페리의 오페라 ‘다프네’를 인류 최초의 오페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작품은 소실되어 지금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대신에 지금 남아 있는 오페라들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1600년에 페리가 작곡한 ‘에우리디체’이다. 당시 피렌체에서는 르네상스 바람이 불고 있었다. 고대 그리스의 신화를 소재로 한 조각이나 건축에서 영감을 얻었던 일군의 문학가와 음악가들은 그리스 비극을 바탕으로 한 멋지고 세련된 음악극을 창조하기 위해 노력했다.”

귀족적? 사회고발성 강한 저항예술

전통과 역사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과거에는 전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예술 형태인 오페라는 그렇게 탄생했다. 그리고 오페라는 등장하자마자 예상을 뛰어넘어 대중적 인기를 얻게 됐고, 그 열풍은 전 세계로 급속히 퍼져나갔다. 일본에서조차 직장인들이 퇴근한 뒤 맥주 한 잔 하면서 대화를 나눌 때 오페라를 모르면 안 되는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오페라에 대한 오해와 편견도 여전히 존재한다. ‘오페라는 귀족적’이라는 비판적 인식도 그 중의 하나다. 진실은 그 정반대인데, 오페라는 스스로의 수완과 재능으로 부를 축적한 신흥 자본가들이 혈통으로 부를 세습한 기존의 왕족과 귀족을 조롱하고 공격하기 위해 만들어진 저항의 예술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왕이나 귀족들은 모차르트나 베토벤 같은 뛰어난 음악가를 궁전이나 저택으로 불러서 ‘특별한 소수를 위한 연주회’를 열었다. 그러나 귀족들의 궁정에서 시민들의 극장으로 나온 오페라는 달랐다. 상인들도 돈만 있다면 표를 사서 귀족이나 제후들과 나란히 앉아서 오페라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것은 공연의 민주화이자 자본주의화의 시작이었다. 오페라 내용도 상당히 공격적이고 사회고발성이 강했다.”

따라서 ‘오페라는 귀족적’이라는 비판은 부당하다는 것이 박 대표의 반론이다. 이어서 ‘오페라는 어렵다’는 오해와 편견도 과감하게 벗어던질 것을 주문했다. 그 연장선 위에서 ‘오페라는 반여성적’이라는 비판이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다는 사실도 소개했다. ‘라 트라비아타’ 등 많은 오페라가 소프라노의 비극적 죽음으로 끝나는 것을 염두에 둔 지적일 것이다.

“사실 모든 오페라는 이야기 구조가 뻔하다. 전부 여자 주인공인 소프라노가 죽는 것으로 끝난다. 극단적으로 압축하면, ‘한 여자가 살았다네. 그런 여자에게 남자가 와서 구애를 한다네. 그래서 연애를 하면 남자는 꼭 여자를 버린다네. 희생당한 여자는 자신의 목숨을 버린다네’가 된다. 이러한 메커니즘을 파악한다면 줄거리에 집중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오페라는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를 어떻게 음악과 미술로 표현하고 있는지를, 나아가 가수가 어떻게 노래와 연기로 소화하는지를 감상하는 예술이다. 남존여비 사상이 강해서 소프라노를 죽이는 것도 아니다. 여자가 죽는 이유는 순결하기 때문이다. 남자들이 분탕질해 놓은 세상을 여자들이 목숨으로 정화시킨다는 것이 오페라의 정신이다.”

박 대표는 오페라를 단순히 음악적 장르만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에 대해서도 반론을 제기했다. 물론 처음에 오페라는 문학과 연극에 음악이 합쳐지면서 만들어진 예술이다. 하지만 지난 400년 동안 오페라가 발달하면서, 더 많은 장르의 예술들이 오페라 무대 위에서 발달해 왔다. 그것을 제대로 이해할 때 오페라의 진가를 깨닫게 된다는 것이 박 대표의 주장이다.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비롯한 오케스트라들은 사실 오페라 반주를 위해서 발달한 악단들이다. 무용도 그렇다. 볼쇼이 발레단이나 로열 발레단도 오페라 극장의 발레단으로서 오페라 안의 발레를 공연하는 것이 중요한 임무였다. 그런 예는 수없이 많다. 현대 연극에서 엄청나게 발달한 조명이나 디자인 역시 오페라에 신세를 지고 있으며, 라스베이거스 쇼에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특수 장치와 효과들도 사실은 이미 바로크 시대와 그랜드 오페라 시대에 오페라에서 많이 성행했던 스타일의 현대판인 셈이다. 요즘의 패션쇼, 헤어쇼, 서커스 같은 것들도 사실은 오페라 무대에서 고도로 발전할 기회를 얻었던 것들이다. SF영화에서 긴장감을 높여주는 요소들도 이미 바그너 오페라에서 시도됐던 해법을 계승한 것이다.”

이처럼 수많은 현대 예술들이 오페라의 발전 과정에서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박 대표의 설명이다. 그러니까 오케스트라, 합창, 무용, 안무, 연기, 연출, 특수효과, 조명, 무대 디자인, 분장, 소품 등과 같은 무수한 장르들이 오페라에 신세를 톡톡히 지고 있다는 말이 된다. 박 대표는 “오페라는 세계 디자인의 새로운 각축장이 되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사실은 이미 세계의 유명한 디자이너들은 거의 다 오페라에 나왔다고 봐도 된다. 과거 피카소, 샤갈, 마티스 등이 모두 오페라 무대를 디자인했고, 최근에는 데이비드 호크니나 시드니 놀란 같은 세계적인 아티스트들도 오페라를 디자인했다. 유럽에서 가장 뜨고 있는 화가인 카렐 아펠 같은 사람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무대를 만드는 등 최근 오페라 무대는 사실 최첨단 디자인의 전시장이다. 또한 세계적으로 유명한 오페라 연출가들도 대부분 음악가가 아니라 미술가 출신이다. 프랑코 제피렐리는 조각을 전공했으며, 장 피에르 포넬은 건축가였고, 귄터 슈나이더 짐센은 조명 디자이너였다. 의상도 역시 마찬가지다. 크리스찬 라크로와나 엠마누엘 웅가로 같은 디자이너들이 만든 수준 높은 의상을 배우들에게 입힌다.”

“오페라 하우스는 건물이 아니다”

박 대표는 “오페라에 대한 이해는 서양 예술의 정수에 도달하는 첩경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오페라는 서양의 자본주의를 융성하게 만들었고, 신흥 자본가들의 교양 수준을 한 단계 높여 놓았다. 오페라에 대한 ‘주체적 이해’도 아울러 주문했다. 예컨대 오페라에서 우리의 판소리를, ‘돈 카를로’에서 사도세자의 비극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페라는 한 나라의 문화 수준을 읽을 수 있는 지표가 되고 있다. 특히 우리가 속해 있는 동아시아에서도 오페라는 문화산업의 중요한 아이콘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일본 도쿄의 신주쿠에 가면 신국립국장을 중심으로 한 블록 전체가 오페라의 거리로 꾸며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전 세계를 직접 돌아본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일본의 오페라 수준은 가히 세계 최고라고 할 수 있다. 세계적인 오페라 공연팀과 관광객이 오페라 공연과 관람 때문에 매년 일본을 찾고 있을 정도이다.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 자체적으로 제작한 공연도 항상 매진을 기록하고 있다. 중국도 최근 베이징 올림픽을 계기로 오페라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다. 상하이와 베이징에 세계 최고의 오페라 하우스가 오픈했는데,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얼마 전에 중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젊은 피아니스트인 랑랑이 박 대표가 운영하는 풍월당을 방문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중국의 피아니스트가 몇 명이나 되느냐고 묻자 4000만명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언제든지 오페라를 비롯한 고급문화의 수요층이 될 수 있는 사람도 3000만명에 이른다는 설명도 이어졌다. 오페라를 즐기면서 교양 수준을 높이는 동시에 미증유의 문화시장도 개척하는 일석이조의 ‘새로운 무대’를 거부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한국의 지도자들이 아직도 오페라 하우스를 ‘소프트웨어’가 아니라 ‘하드웨어’로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과 서양에서 활동하는 한국의 외교관이 가장 힘들어하는 3가지 문화 장벽이 와인, 테이블 매너, 오페라라는 사실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터! 장애물을 도약대로 만드는 지혜가 요구된다.

여의도통신=정지환 기자 ssal@ytongsin.com

박종호 대표의 이력서

▲ 한양대 의과대학 외래교수
▲ 한림대 의과대학 외래교수
▲ 클래식 전문 음반매장 풍월당 대표
▲ 한국오페라단 예술단장
▲ 박종호 정신과의원 원장
▲ 오페라평론가 및 칼럼니스트
저서: <내가 사랑하는 클래식 1, 2>, <유럽음악축제 순례기>, <불멸의 오페라 1, 2>, <박종호에게 오페라를 묻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