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을 여는 강연'은 "좋은 사람이 좋은 세상을 만듭니다"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있는 한국인간개발연구원(KHDI)의 조찬강연을 지상중계하는 코너입니다. KHDI가 지난 33년 동안 매주 목요일 오전 7시에 1540회(금주 기준)나 진행해 온 조찬강연은 국내 최다 회수를 기록하며 최고 권위의 강연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지난 3월 13일 롯데호텔 2층 에메랄드룸에서 KOTRA 외국인투자 옴부즈만을 맡고 있는 안충영 중앙대 국제대학원 석좌교수가 ’새정부 출범과 신성장동력 육성전략‘이라는 주제로 강연한 내용을 정리한 이 기사가 독자들의 교양 쌓기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편집자주)

한국경제가 샌드위치 신세에서 벗어나려면?

“한국경제는 지금 십자로(十字路)에 서 있다. 어느 방향으로 갈 것인지 선택하느냐에 따라 국가의 운명이 크게 바뀔 것이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에서 외국인투자 옴부즈만을 맡고 있는 안충영 중앙대학교 국제대학원 석좌교수는 강연의 서막을 이렇게 열었다.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와 국제대학원 원장, 한국국제경제학회 회장과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원장 등의 화려한 직함과 이력이 말해주듯, 그는 국제경제학계를 대표하는 석학으로 평가받는다. 그래서였을까. 십자로라는 갈림길에 선 한국경제가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국제적인 사례부터 소개했다.

“한국경제는 선진국 진입에 실패함으로써 저성장의 함정에 매몰되기 직전의 상황에 처해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용어가 있는데, ‘중진국 신드롬’이 바로 그것이다. 실제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선진국에서 중진국으로 추락한 사례는 찾아볼 수 있어도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진입한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경제규모 6위의 부국이었지만 페론정권이 포퓰리즘 정책을 시행한 이후 몰락의 길을 걸으면서 툭하면 IMF 구제금융을 받았던 아르헨티나가 전자의 대표적인 사례에 속한다. 물론 싱가포르를 후자의 사례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싱가포르는 어디까지나 인구 400만의 도시국가일 뿐이다. 1차, 2차, 3차 산업이 공존하는 정상국가가 아니기에 적절할 사례라고 할 수 없다.”

'중진국 신드롬' 수렁에서 벗어나야

그런 점에서 4800만의 인구를 보유한 한국은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최초의 정상국가가 될 것으로 기대됐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고도성장의 대명사였던 한국은 결국 위대한 신화를 이루지 못했다는 것이 안 교수의 설명이다. 설상가상으로 한국경제는 중국경제와 일본경제 사이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면서 ‘샌드위치’ 신세가 되고 말았다.

“중국에는 ‘노동집약’만 존재할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착각이다. 중국에선 지금 ‘자본집약’과 ‘기술집약’도 자주 목격된다. 그것도 시차를 두고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전 부문과 산업에서 우후죽순처럼 동시에 약진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예를 들면 우주산업, 바이오산업, 물류혁명 분야에선 이미 중국이 한국을 앞질렀다는 것이 많은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공계 박사를 양산해 국가를 이끌어나갈 테크노크라트로 키워내는 것은 ‘인해전술’을 닮았다. 실제로 2002년 미국 이공계 대학에서 배출된 박사를 보면 중국인 2100명, 한국인 700명이었다. 이렇게 중국이 한국을 거의 따라잡은 것도 모자라 추월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면 일본은 한국의 추격을 저만치 따돌리고 간격을 벌려가며 질주하고 있는 양상이다.”

일본은 소재, 부품, 조립, 가공 분야에서 세계적인 경쟁우위를 확대해 나가고 있다. 이와 관련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친환경 자동차의 대명사가 된 도요타의 하이브리드카이다. 안 교수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수평적 동반자 관계도 거론했다. 대기업이 자금을 지원하고 공동으로 기술을 개발하는 공존공생이야말로 일본경제 최대의 경쟁력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명박 정부가 747이라는 경제정책을 제시하며 출범했다. 747정책은 연평균 7% 성장률을 달성해 1인당 국민소득 4만달러의 세계 7대 경제대국으로 성장하겠다는 장기적인 비전이다. 만약 ‘우리는 다시 할 수 있다’는 국민적 의지와 에너지를 되살리는 한편 ‘미래의 먹거리’인 신성장 동력을 찾아내어 제대로 육성만 할 수 있다면 결코 불가능한 목표만은 아니라고 본다. 그러나 주체적인 의지나 열정과 무관하게 객관적인 대외 여건은 결코 만만치 않다.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와 경기침체에 대한 부시 대통령의 공식 인정, 사상 초유의 고유가와 농산물을 비롯한 원자재 가격 상승, 중국경제의 고도성장 조정과 연착륙 여부 등 간단하게 넘어갈 수 있는 문제는 하나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욱이 한국경제는 만성적인 저성장의 함정에 빠져 있다는 것이 안 교수의 설명이다. 8%에서 5%, 4% 대로 급격히 떨어지고 있는 잠재성장률이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셈이다. 1987~1997년 1.6%이던 생산가능인구 증가율이 2000년 이후 다시 0.6%까지 떨어진 저출산 고령화 현상도 심각한 문제다. 애초에 단기적으로 개선하기 어려운 과제이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한 나라의 경제가 성장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노동스톡(Labor Stock)과 자본스톡(Capital Stock)의 동반 상승이 전제돼야 한다. 여기에다 총요소생산성 증가율이 더해질 때 내실 있는 경제성장이 가시화된다. 그런데 앞에서 지적한 저출산 고령화 현상이 말해 주듯이 노동스톡 증가율은 당분간 정체를 면치 못할 것이다. 자본스톡 증가율도 하락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이른바 산업공동화를 초래한 기업의 국내투자 부진과 해외투자 확대, 외국인투자(FDI) 저조가 그것을 웅변해준다. 총요소생산성 증가율도 정체하고 있는데, 법과 원칙의 붕괴, 각종 규제의 난립과 혼선, 경제 의지 저하, 교육과 훈련의 부재 등이 그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그렇다면 과연 어디서부터 돌파구를 찾아야 할까. 안 교수는 문제 속에 해답이 있다고 말했다. 가능한 것부터 하나씩 실천하자는 말도 했다. 안 교수는 특히 총요소생산성의 증가율을 높이는 일에 주목했다. 법과 원칙을 준수하고, 각종 규제를 혁파하고, 경제 의지와 자신감으로 재무장하고, 교육과 훈련을 실시한다면 절망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무엇보다 먼저 법과 원칙이 준수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고성형통(高聲亨通)’이라는 말이 있는데, 떼를 쓰면 다 통한다는 이 못된 관행은 반드시 극복해야 한다. 실제로 한국의 법과 질서 준수 정도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30개국 중에서 27위(2007년 기준)로 매우 낮다. OECD 회원국의 평균적인 법과 질서 준수 지수만 유지해도 매년 1% 내외의 추가 성장이 가능하다는 연구 결과까지 나와 있다(차문중 한국개발연구원 수석연구위원). 불법 복제와 유통 등 지적재산권 침해도 근절해야 한다. ‘짝퉁’이 판치는 사회에선 ‘명품’이 발을 붙일 수 없다. 투명한 기업지배 구조를 정착시켜야 한다. 기업의 비자금 조성 관행은 이제 박물관으로 보내야 한다. 그래야 노조에 대한 도덕적 힘을 갖게 될 것이다.”

'고용 없는 성장'의 한계 극복해야

이어서 안 교수는 규제의 혁파를 주문했다. 경제성장의 발목을 잡는 ‘덩어리규제’를 철폐하기 위해선 규제개혁법과 규제일몰제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내놓았다. 관련법이 개정돼도 시행령, 시행세칙, 지침 등에 여전히 숨어 있는 규제도 간과하지 말라고 했다. 공무원의 자의적 해석이 가능한 ‘회색지대’가 존재하지 않는지 주도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경제회생을 위한 기초가 튼튼하게 마련됐다면 이제 그 위에 어떤 기둥을 세울 것인지 치밀하게 전략을 짜야 한다. 반도체, 디스플레이, 자동차 및 조선, 섬유의류, 생산시스템, 화학공정소재, 금속재료(이상 7개 전통적인 주력산업), 바이오, 차세대로봇, 디지털컨버전스, 차세대의료기기(이상 4개 미래유망산업), 나노기반, 생산기반, 청정기반, 지식서비스기반(이상 4개 지식기반산업) 등의 목록 중에서 한국경제를 먹여 살릴 신성장동력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숙고해서 선택한 뒤에는 집중적인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산업 간의 조화나 융합도 고려해야 한다. 조선, 철강, 전자, 반도체 등 전통적인 비교우위 산업에 IT, BT, NT를 접목시켜 퓨전 효과를 지속시켜야 한다. ‘고용 없는 성장’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미·감·유·창(美·感·遊·創)의 지식기반 경제체제를 구축하여 고급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역발상도 요구된다.” /정지환 기자

안충영 교수의 이력서

▲ 경북대 경제학과 졸업
▲ 미 하와이대 경제학 석사
▲ 미 오하이오주립대 경제학 박사
▲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 학과장
▲ 중앙대 국제대학원 원장, 석좌교수
▲ 말레이시아 수상실 국제연합공업개발기구(UNIDO) 연구단장
▲ 한국국제경제학회 회장
▲ 조흥은행 이사회 의장
▲ APEC 경제위원회 의장
▲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원장
상훈: 매일경제신문사 이코노미스트상, 일본 제1회 NIRA 오키타 정책연구상, 옥조근정훈장 외
저서: <한국산업구조의 장기예측>, <한국경제를 보는 눈>(공저), <21세기 신조류와 한국에 끼치는 영향>(공저)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