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 퍼붓고, 불편 떠 앉고 … 국회 심의에 경종

2005년 9월, 한국은 또 한 번의 대란을 겪어야 했다. 일명 ‘여권대란’이었다. 그동안의 사진부착식 여권에서 사진전사식 여권으로 발급 체계를 변경하면서 여권의 발급처리가 늦어지게 된 사건이다.

이것이 문제가 된 이유는 단순히 특정 기간에 여권 신청이 몰려서라기보다는 발급 체계를 바꾸면서 발생하게 될 여러 문제들을 미리 예측하지 못한 채 기존방식 그대로를 고수하면서 이전단계보다 국민이 느끼는 불편함은 더욱 커지게 됐기 때문이다. 다행히 발급기관을 확대하고 발급방식을 개선하면서 이에 대한 불편함은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

그런데, 지난 2월13일 또다시 새로운 체계의 여권발급이 가능할 수 있도록 하는 여권법의 개정안이 해당 상임위인 통외통위를 통과했다. 세부내용은 2008년 하반기부터 개인의 신상 정보와 바이오 인식정보(개인의 지문내역)가 저장된 칩을 내장한 이른바 전자여권의 발급이 가능하도록 하는 내용이다.

이전에 국회에서는 작년 예산심의를 통해 여권업무 선진화와 관련된 예산을 전년도에 비해 1백42억5천6백만 원이 증액된 7백64억5천7백만 원으로 통과시켰다. 이는 외교통상부 소관 세출 예산의 6.6%를 차지하는 액수이다.

이렇게 예산이 증액된 이유는 ‘전자여권발급시스템구축’을 위한 예산이 2007년의 10억 원에 비해 1,470.6%에 해당하는 1백47억6백만 원이 대폭 증가한 1백57억6백만 원으로 편성되었기 때문이다.

정부와 국회는 2005년의 ‘여권대란’이 안정화되자마자 2006년부터 새로운 여권체계인 전자여권으로의 변경을 논의하였고 결국 올해 하반기가 되면 또다시 여권이 바뀌게 되고 그 불편은 국민이 고스란히 안을 수밖에 없게 됐다.

2005년도 발급체계를 변경할 때 전자여권의 도입 여부가 논의되었으나 기술적으로 문제가 있음을 판단, 지금의 여권체계를 가져왔고 결국 새로운 발급을 위해서는 발급기계를 전면 교체하거나 업그레이드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현재 사용하고 있는 기계는 전자여권의 발급이 가능하다고 얘기하고 있지만 이미 작년부터 LG와 신여권통합정보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한 사업계약을 체결한 상태이고, 사진전자여권 발급기를 전자여권 발급용으로 업그레이드하는 사업계약 체결을 추진 중에 있다. 누구의 요구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던 여권발급체계의 변경을 급하게 시행하다가 국민의 불편만 증가시키고 불필요한 예산이 들어가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문제는 이 뿐만이 아니다. 단순히 발급상의 불편을 떠나 새롭게 제안되고 있는 전자여권에는 개인의 신상정보와 생체정보가 포함되게 된다. 이는 국민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철저히 침해받을 수 있는 소지가 다분함으로 그 위험을 많은 시민단체들이 얘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욱 많은 논의과정과 다양한 의견을 듣고 합의를 내려는 노력보다는 미국과의 비자면제프로그램에 우선적인 요구사항이 될 수 있음과 세계적인 추세라는 이유로 국회는 법안과 예산을 급속하게 통과시켰다.

이는 단순히 국내에서의 정보유출 뿐만 아니라 정보의 활용도가 전 세계로 확장되는 일이기 때문에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국회가 그에 대해 얼마나 신중한 고려를 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현재 유럽의 경우, 생체정보가 유출되는 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함에 따라 점차 일명 생체여권의 발급을 원래의 형태로 돌리고 있는 추세이다.

다른 한편으로, 국회에서는 예산을 심의할 때 제대로 법적 근거도 없는 사업과 정책에 대해 질타를 하곤 한다. 그런 현상이 발생하는 요인은 중요한 사업에 대해 국회가 법안 심의를 게을리 했거나, 제대로 법적 근거도 없는 사업에 대해서 정부가 요구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이 때 비껴갈 수 없는 사실은 국민의 예산을 사용하는 만큼 마땅히 심의 과정에서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회는 매번 사실상 법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예산부터 통과시키는 이상한 모습을 보이고 있고, 전자여권발급의 경우도 법적 근거도 없는 예산을 먼저 통과시키고 법안을 만드는 비정상적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는 국회 스스로 예산심의권을 흐트러뜨리는 것임과 동시에 부적절한 예산사용이 가능하도록 하는 여지를 남기는 것이다. 법안의 내용이 당초 통과된 예산안의 내용과 차이가 발생할 경우, 예산의 이·전용이 발생하는 것은 충분히 예상 가능하다. 제대로 된 법안의 심의가 중요한 만큼 정도를 거친 예산심의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채연하(함께하는시민행동 정책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