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을 여는 강연'은 "좋은 사람이 좋은 세상을 만듭니다"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있는 한국인간개발연구원(KHDI)의 조찬강연을 지상중계하는 코너입니다. KHDI가 지난 33년 동안 매주 목요일 오전 7시에 1534회(금주 기준)나 진행해 온 조찬강연은 국내 최다 회수를 기록하며 최고 권위의 강연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지난 1월 24일 롯데호텔 2층 에메랄드룸에서 콘노 유리 일본 생활과학연구소 대표가 ‘새로운 라이프스타일과 비즈니스의 컨버전스’라는 주제로 강연한 내용을 정리한 이 기사가 독자들의 교양 쌓기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편집자주)

"아픈 기억에서 소통의 가치 배웠다"

일본에서 ‘벤처기업의 대모(代母)’로 불리는 콘노 유리 생활과학연구소 대표(72)는 동시대의 일본 여성들과는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았다. 1969년 선구적으로 텔레마케팅과 쌍방향통신이라는 개념을 도입해 다이얼서비스(주)를 설립한 그녀는 일본 벤처기업의 모임인 뉴비즈니스협의회연합회의 부회장, 고이즈미 총리 산하기구인 ‘2001일본위원회’의 이사장으로도 활동했다.

“누구나 성장하면서 안 좋은 일을 겪는데, 열심히 살다 보면 나중에 가서 그 이유를 알게 된다.”

강연 서두에 콘노 대표가 의미심장하게 던졌던 말이다. 실제로 1936년 태어난 그녀는 유년 시절에, 어른이 되고 나서도 결코 잊을 수 없었던 ‘안 좋은 일’을 겪었다.

“나의 고향인 미에현의 쿠아나는 1945년 종전 무렵 미군 비행기의 폭격을 받아 한 순간에 마을 전체가 사라져 버렸다. 그날 밤 어머니가 ‘어서 일어나라’고 외치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나 보니 창밖은 온통 시뻘건 불덩이로 변해 있었다. 집 밖으로 뛰쳐나오자 여기저기 폭탄이 떨어지고 있었고, 비명을 지르며 도망 다니던 우리 가족은 어느새 뿔뿔이 흩어졌다. 혼자 떨어진 나는 앞뒤에서 터지는 폭탄 때문에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했다. 공포의 밑바닥으로 추락하는 순간 나는 큰 소리로 절규했다. ‘하나님, 왜 어린 저를 이런 지옥 같은 곳에서 죽어가게 놔두시는 거죠? 만약 살려만 주신다면 나와 같이 어려움에 처한 아이들을 위해서 평생 동안 살게요!’ 잠시 후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나는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휠체어 탄 미국인 기자와의 만남

그 일을 계기로 콘노 대표의 삶에는 큰 변화가 생겼다. 무엇보다 먼저 성장하면서 사고와 행동이 신중하고 진지해졌다. 다른 누구와도 아닌 하나님과의 맹세였기에 그 약속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강한 생각도 갖게 됐다. 부모님이 인연을 끊겠다고 엄포를 놓건 말건 나고야에서 밤 열차를 타고 도쿄라는 미지의 세계로 떠날 수 있었던 용기도 이와 무관치 않다.

“그런 각오로 대학에 진학하고 졸업까지 했다. 하지만 세상은 생각보다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내가 취직하고 싶었던 기업에서는 여성 직원은 아예 채용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닌가. 커다란 좌절감과 배신감이 밀려 왔다. 그러나 패배자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때 나는 일본 사회 속에 여성이 일할 공간이 없다면, 스스로 일할 곳을 개척해 나가자고 마음먹었다. 대학을 졸업한 지 10년 후가 되는 1969년 5월 1일을 D-day로 잡았다. 그리고 그때까지 10년 동안 후회 없이 열심히 살아보자고 각오했다. 그러던 중 기회가 왔다. 1964년 당시 함께 일하던 작가 2명이 뉴욕에서 열리는 세계박람회에 도우미로 참가할 것을 권유한 것이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마침내 나는 뉴욕행 비행기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콘노 대표는 뉴욕에 도착한 뒤 엄청난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그런데 어느 날 홍보 담당으로 매일 많은 언론인을 상대하고 있던 그녀에게 휠체어를 탄 한 미국인 기자가 찾아왔다. 콘노가 일본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 기자는 ‘일본 어디에서 왔느냐’고 물었고, 그녀는 고향 이름을 불러줬다. 그러자 그 기자가 너무나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악수를 청했다.

“그 기자는 나에게 ‘지금까지 무사하게 살아있어 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젊은 시절 공군으로 근무하면서 내 고향을 공습했던 가해자 중의 한 명이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당시 자신이 많은 민간인을 죽이게 됐고, 그 때문에 정신적 고통을 받다가 결국 하반신이 마비되는 증세까지 겪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미 고통을 통한 성숙한 변화의 체험을 했던 나는 거꾸로 그 기자를 위로했다. ‘고통스런 기억의 날들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뉴욕에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 아니겠어요. 이제 당신도 마음의 고통에서 벗어나세요’라고 격려해준 것이다. 그 기자가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사실을 지금까지 마음에 담아두고, 더욱이 진실로 미안해하고 있었기에 그런 말을 던졌다. 우리는 두 손을 마주잡고 울었다.”

콘노 대표는 다시 한번 단련의 시간을 가졌다. 뉴욕에서 받은 돈을 밑천 삼아 찾아간 유럽이 단련의 공간이 됐다. 특히 베를린에서 만난 한국 유학생들과의 인연이 그녀에게 다시 한번 용서와 화해, 즉 소통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만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목표로 삼았던 회사 설립의 순간이 왔다. 1969년 일본으로 돌아와 ‘전화를 이용한 사업’을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전화를 이용한 다이얼 서비스는 일본에선 최초로 도입된 사업이었다. 미국에서 목격하고 습득했던 텔레마케팅을 벤치마킹한 것이었지만, 나는 거기에만 안주할 수는 없었다. 가능한 많은 돈을 벌되, 이왕이면 사람과 세상을 위해서 유익한 일을 하고 싶었다. 세계 최초의 쌍방향 전화 육아 상담 ‘아이 110번 서비스’는 그렇게 탄생했다. 당시 일본은 고도성장을 거듭하던 시대였다. 무엇보다 돈이 최고의 가치로 통하던 상황에서 나라는 부자가 되었는지 모르지만 서민들의 마음은 점점 병들어가고 있었다. 급격한 도시화와 핵가족화 속에서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기이한 현상들이 나타났다. 육아 노이로제에 시달리던 젊은 엄마들이 자기의 생명보다 소중한 아이를 죽이는 엽기적인 사건도 그 중의 하나였다.”

아사히신문 한 구석에 ‘아이 110번 서비스’가 작게 소개됐다. 그러나 바짝 마른 들판은 불씨 하나만 있어도 무서운 기세로 타오르는 법이다. 육아 노이로제로 고통 받으면서도 호소할 길이 없던 전국의 주부들이 전화기 다이얼을 돌리기 시작했다. 오죽하면 일본전신전화공사 직원들이 찾아와 “당신들 때문에 전화 회선이 ‘펑크’ 났다”고 항의했을 정도였다.

“전신전화공사(전전공사) 직원들에게 야단(?)을 맞고 있던 나를 향해 전화 상담을 하던 한 직원이 윙크를 하며 ‘V’ 사인을 보냈다. 백지 상태에서 출발한 우리 사업이 사회적 반향을 얻으며 성공하고 있다는 것을 그 직원도 직감했던 것이다. 하지만 경영적인 측면에서 보면 아직은 수익 창출이 쉽지 않았다. 나는 전전공사 최고경영자인 엔도 사장을 직접 찾아가 육아 상담으로 발생하는 전화 이용료의 절반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첫 반응은 냉담했다. 엔도 사장은 ‘전화를 이용한 사업은 전전공사 이외에는 아무도 할 수 없다’는 공중전기통신법 조항까지 보여줬다. 당대 사람들의 간절한 요구를 무시한 법률이라고 반박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약 3개월 동안 매일 아침 엔도 사장의 출근 시간에 맞춰 전전공사를 찾아갔다.”

"콘노 선생님, 정말 고맙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엔도 사장이 자기 방으로 콘노 대표를 불렀다. 그것은 끈질긴 노력 끝에 첫 번째 후원자를 확보하는 순간이었다. 이어서 야스다생명, 모리나가유업, 도시바 등 굴지의 기업들이 후원사가 되어 주었다. 도요타와 마쓰시다까지 참여하면서 전화 상담 서비스의 종류는 고령자 110번, 일하는 여성 110번, 외국인 110번 등으로 확대될 수 있었다.

“나고야 지방에 출장을 갔다가 돌아오는 열차에서 우연히 도요타 쇼이치로 회장의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이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나는 일본의 아이들이 얼마나 위험한 상태에 놓여 있는지를 열정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도요타 회장이 ‘그 일이 나와 어떤 관계가 있죠?’라고 물었다. 나는 이렇게 답변했다. ‘지금 바로 이 아이들이 도요타 자동차의 고객이 될 순 없어요. 하지만 도요타가 자신들을 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좋은 기억으로 간직하지 않겠어요?’ 그러자 한동안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있던 도요타 회장이 입을 열어 돕겠다고 약속했다. 그렇게 도요타 자동차가 스폰서가 된지 벌써 26년이 흘렀다. 고령자를 위한 전화 상담 서비스는 마쓰시다 고노스케 회장의 도움으로 가능했다.”

그런데 콘노 대표가 자신이 평생 일군 사업에서 가장 큰 보람을 느끼는 순간은 따로 있다. 콘노 대표는 가끔 지방으로 강연이나 공연을 하러 가는데, 청중은 물론이고 때로는 사업 파트너까지 아이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외친다고 한다.

“저는 어린 시절 거의 매일 밤 고민이 생길 때마다 ‘아이 110번 서비스’로 상담을 했습니다. 전화로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고, 거기에서 위로와 격려를 받았지요. 그래서 이렇게 건강하게 자랄 수 있었습니다. 콘노 선생님, 정말 고맙습니다.” /여의도통신 정지환 기자

콘노 유리 대표의 이력서

▲ 츠다쥬쿠대학 졸업
▲ 1969년 다이얼서비스(주) 설립
▲ 1979년 (주)생활과학연구소 설립
▲ 뉴비즈니스협의회 이사, 부회장
▲ 뉴비즈니스협의회연합회 부회장
▲ 미국 여성경영자 200명회(The Committee of 200) 첫 일본인 멤버
▲ 경제동우회 간사
▲ 도쿄상공회의소 의원
▲ (재)2001 일본위원회 이사장
▲ 도쿄가스(주) 사외이사
▲ 서던 크로스컨츄리클럽 이사장
상훈: 세계의 우수 여성 기업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