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을 여는 강연'은 "좋은 사람이 좋은 세상을 만듭니다"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있는 한국인간개발연구원(KHDI)의 조찬강연을 지상중계하는 코너입니다. KHDI가 지난 32년 동안 매주 목요일 오전 7시에 1532회(금주 기준)나 진행해 온 조찬강연은 국내 최다 회수를 기록하며 최고 권위의 강연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지난 1월 10일 조선호텔 2층 오키드룸에서 박태호 무역위원회 위원장이 ‘한국 기업, 글로벌리제이션과 FTA 파고 어떻게 넘을까’라는 주제로 강연한 내용을 정리한 이 기사가 독자들의 교양 쌓기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편집자주)

"국제 규칙 알아야 무역 전쟁 이긴다"

“한국의 총 무역 규모는 2007년 말 기준 약 7000억 달러에 달한다. 무역은 수입과 수출을 모두 합친 것을 말하는데, 7000억 달러 정도면 세계 10~11위의 교역국에 해당된다. 하지만 그 중에서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나라와의 무역이 차지하는 비율은 채 4%가 되지 않는다. 현재까지 한국이 FTA를 체결, 그 효력이 발휘되고 있는 사례는 4건이다. 칠레, 싱가폴, EFTA(스위스,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리히텐슈타인), ASEAN 등이 바로 그 4건의 FTA 파트너들이다(참고로 아세안의 경우 상품은 발효 중이지만 투자/서비스는 협상 중이다). FTA 파트너와의 무역 비율 세계 평균이 약 52%(약 40개 국가와 FTA를 체결한 멕시코는 87%)라는 점에서 볼 때 한국의 개방 수준이 아직도 미흡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연구조정실장, 세계무역기구(WTO) 분쟁조정위원, 국제금융센터 운영위원 등 다양한 국·내외 경제기구에서 활동하며 이론과 경험을 쌓아온 박태호 산업자원부 무역위원회 위원장(서울대 국제대학원 원장)은 한국의 개방지수가 여전히 국제 수준에 비해 뒤떨어진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으로 말문을 열었다.

“여기서 시급하게 대두되는 과제가 있는데, 한미FTA 국회 비준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이미 우리는 2007년 4월 말 미국과의 FTA 협상을 끝냈다. 6월 말에는 양국 대표가 참여한 가운데 코러스(KOREA+USA)FTA 협정안에 공식 서명까지 했다. 전체 대외 무역 중에서 대미 무역 규모가 15~20%이므로 ‘FTA 개방지수’를 4%에서 20%로 점프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다. 한·미FTA가 중요한 이유는 이뿐만이 아니다. 현재 국내의 큰 반대 없이 협상이 진행 중인 유럽연합(EU)과의 FTA(교역 비율 약 10%), 연구가 한창 진행 중인 중국과의 FTA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만약 한·미FTA 국회 비준이 지체되거나 결렬될 경우 EU는 서두르지 않고 관망하는 자세로 돌아설 것이다.”

'다자간 체제'에서 '양자간 체제'로

그러나 여기에는 또 다른 변수가 작용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무엇보다 먼저 집권이 유력시되는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들이 한·미FTA에 대한 반대나 무시의 입장에 서 있기 때문이다. 특히 아이오와 당원대회와 뉴햄프셔 예비경선에서 버락 오바마와 1승1패를 주고받으며 집중 조명을 받고 있는 힐러리 클린턴은 공개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명하기도 했다.

“힐러리가 반대 의견을 강하게 표명한 것은 사실이지만 전후 맥락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통령이 되려는 정치인은 ‘대선의 계절’이 오면 국내 유권자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다. 그런 차원에서 미국 시장을 개방하는, 특히 미국 자동차 시장을 개방해야 하는 내용이 포함된 FTA에 반대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디트로이트로 상징되는 자동차 기업이 밀집한 지역의 노동자 유권자의 지지를 얻으려면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후보의 윤곽이 드러나는 ‘슈퍼 화요일(2월 5일)’이 지나고 막상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된다면 입장이 달라질 것이다. 특정 지역의 유권자가 아니라 미국의 전체 국익과 국제관계까지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3~4월경에 미국 의회에서 비준 동의가 시도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박 위원장이 FTA 추진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WTO체제의 성과와 최근 위기 상황 등 통상 환경의 변화에 주목할 것을 요구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1995년 출범한 WTO는 관세율 인하, 비관세장벽 철폐, 분쟁해결시스템 마련 등의 성과를 거두며 교역량을 증대시켰다. 하지만 출범 12년 만에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됐다고 한다.

“‘다자간 협상 체제’인 WTO가 출범하기 1년 전인 1994년 세계 교역 규모는 8.73조 달러에 불과했지만 2005년 21.2조 달러로 급성장했다. 그러나 거칠 것 없이 달리던 WTO 열차는 농산물 협상 등 개도국 이슈를 다루는 뉴라운드(DDA)가 협상 2년 연장 후 중단되는 사태가 초래되면서 출범 이후 최대의 난관에 봉착했다. 이 시기를 전후로 많은 회원국들이 ‘생존전략’ 차원에서 주변 나라와 ‘양자간 협상 체제’인 FTA를 맺기 시작했다. 사실 한국, 일본, 중국, 홍콩 등 동아시아 국가들은 무역 의존도가 매우 크면서도 2000년까지 FTA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 동아시아에 존재하는 34개의 FTA 중 32개가 2001년 이후에 체결됐다는 것이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WTO의 표류가 FTA의 출범을 앞당긴 것이다.”

실제로 FTA는 교역을 위한 협상의 조류가 됐다. 이미 미국이 15개 국가와 FTA를 체결한 것을 비롯해 칠레가 46개 국가, EU가 39개 국가, 중국이 14개 국가, 일본이 5개 국가, 싱가포르가 24개 국가, 호주가 5개 국가와 손을 잡았다. 점입가경(漸入佳境)이라고나 할까. 브릭스(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가 등장하면서 통상 환경의 변화는 더욱 복잡해졌다.

“풍부한 노동력과 넓은 내수 시장을 보유했음에도 지금까지 무력하기만 했던 브릭스가 본격적으로 시장 개방과 투자 활성화를 추진하면서 세계적인 거대 시장으로 부상하고 있다. 심지어 월스트리트를 지배하는 투자금융회사인 골드만삭스 보고서에 따르면, 향후 30~40년 이내에 브릭스 4개 국가가 G6 국가로 부상할 것이라고 한다. 2005년 G6 멤버인 미국, 일본,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태리가 2040년에는 미국, 일본, 중국, 인도, 러시아, 브라질로 전면 교체될 것이라는 말이다. 사실 우리에게도 브릭스의 중요성은 급격히 증대하고 있다. 예컨대 중국은 2003년부터 미국을 제치고 한국의 최대 수출 대상국이 됐다. 참고로 1990년 중국의 순위는 19위였다. 인도(28위→11위)와 러시아(50위→13위)의 처지도 비슷하다.”

수출과 수입 등 교역이 증대하면 반드시 나타나는 문제가 있다. 무역 분쟁이 바로 그것이다. 해외에서 수입된 상품이 국내 산업과 기업에 손해를 입히거나 위기를 가져올 경우, 과거 개도국 시절에는 살인적 관세율과 비관세장벽 등 손 쉬운 방법을 동원해 막아냈다. 그러나 WTO체제가 출범한 이후 이러한 꼼수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국제 규정에 근거한 무역구제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현재 WTO가 불공정하다고 판단하는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덤핑’과 ‘보조금’을 들 수 있다. 따라서 이에 대해서는 높은 관세를 매기는 방법으로 ‘합법적인 제재’를 가할 수 있다. 덤핑을 방지하는 관세를 통해서 현대중공업의 산업용 로봇을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이 대표적 사례에 속한다. 현대중공업이 산업용 로봇을 만들기 시작할 무렵인 2005년 갑자기 일본에서 산업용 로봇이 들어 왔다. 상대적으로 뛰어난 기술에다 가격도 쌌기 때문에 그대로 방치할 경우 자생적 국내 기술이 사라질 위험에 처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저렴한 가격이 덤핑에 걸린다는 사실을 알아내면서 5년 동안 4~10%의 관세를 부과할 수 있었다.”

덤핑, 보조금, 세이프가드 활용을!

그렇게 숨통이 트인 사이에 현대중공업이 산업용 로봇 기술을 발전시켜 경쟁력을 갖출 수 있었음은 물론이다. 이어서 박 위원장은 외국 기업이 비록 덤핑도 안 하고, 보조금도 지급받지는 않았지만 특정 시기에 너무 많이 수출하는 바람에 국내의 특정 산업이나 기업에 심각한 피해를 줄 경우의 구제 방법인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도 소개했다.

“산업자원부 산하에 설치돼 있는 무역위원회가 바로 그런 업무를 관장하는 기구이다. 앞으로 국내 기업들이 무역구제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 기구를 적절하게 활용했으면 한다. 물론 미국에도 무역위원회가 있는데, 그 규모와 기능과 권한이 우리와 확연히 다르다. 우선 미국에선 박사급 전문가 50명을 비롯해 350명이 일하고 있다. 아울러 6명으로 구성된, 임기 9년의 위원들이 상근직으로 일하고 있다. 반면 우리는 9명으로 구성된, 임기 3년의 위원들이 비상근직으로 일하고 있다. 심지어 위원장조차 비상근직이며 한 달에 한 번 정도 회의에 참석할 수 있을 뿐이다. 무역구제의 중요성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대각성이 요구되는 대목이다.” /여의도통신=정지환 기자

박태호 위원장의 이력서

▲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 미 펜실베니아주립대 경제학 석사
▲ 미 위스콘신매디슨대 경제학 석·박사
▲ 세계은행 컨설턴트
▲ 한국개발연구원 연구위원
▲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연구조정실장, 부원장
▲ 세계무역기구 분쟁조정위원
▲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위원
▲ 서울대 대외교류처 처장, 국제대학원 교수
▲ 국제금융센터 운영위원회 위원
▲ 극동도시가스 사외이사
▲ 산자부 무역위원회 위원장
상훈: 대통령비서실 표창, 대통령표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