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을 여는 강연'은 "좋은 사람이 좋은 세상을 만듭니다"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있는 한국인간개발연구원(KHDI)의 조찬강연을 지상중계하는 코너입니다. KHDI가 지난 32년 동안 매주 목요일 오전 7시에 1531회(금주 기준)나 진행해 온 조찬강연은 국내 최다 회수를 기록하며 최고 권위의 강연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지난 1월 3일 롯데호텔 3층 사파이어볼룸에서 김태길 대한민국학술원 회장이 ‘선진한국의 미래와 한국인의 초상’이라는 주제로 강연한 내용을 정리한 이 기사가 독자들의 교양 쌓기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편집자주)

무엇을 가장 소중히 여기며 살 것인가?

“‘자아’는 물질의 체계가 아니라 의식의 체계다. 의식의 체계로서의 자아는 그 범위가 커졌다 작아졌다 하며 수시로 변화한다. 사과 한 조각을 가지고 어린 형제가 서로 더 먹으려고 경쟁할 경우 그 어린이들은 ‘나’와 ‘너’로 나누어지면서 그들의 자아는 매우 작아진다. 그러나 국제경기를 할 때, ‘대~한 민국! 대~한 민국!’하며 응원에 열중할 경우 그들의 자아는 우리나라의 크기만큼 확대된다. 중요한 것은 평상시의 자아가 얼마나 크냐 작으냐 하는 문제다. 위대한 사람의 자아는 평상시에도 인류 전체 또는 생물의 세계 전체를 ‘나’ 안에 포함하는 반면, 보잘것없는 사람의 자아는 여섯 자도 안 되는 ‘나’의 몸속에 갇혀 있다. 소망스러운 것은 우리들의 자아가 바다처럼 넓은 범위를 유지하는 인품으로 성장하는 일이다.”

김태길 대한민국학술원 회장(88)이 한 신문에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라는 제목으로 기고했던 칼럼의 한 대목이다(문화일보 2007년 12월 15일자). 동경제대 법학부에 입학했으나 해방 직후 무정부 상태에 빠진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서울대 철학과로 전입해 윤리학을 공부했던 그에게 ‘자아 찾기’와 ‘가치관 정립’은 영원한 학문의 주제이자 삶의 목적이다.

“가치관(價値觀)이란 무엇인지 먼저 짚어보고 넘어가기로 하자. 가치관을 단순하게 풀이하면, ‘사물이 가지고 있는 가치에 대한 의식(意識)’이다. 그렇다면 과연 가치는 실재할까? 이와 관련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가치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다른 무엇과의 관계 속에 존재하는가?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가치는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물 혹은 사람의 감정이나 의욕이 관계를 맺는 과정 속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등의 심리가 가치를 낳게 하는 근본 원인이 된다는 말이다. 여기서 필연적으로 두 가지 명제가 도출된다. 사람들의 가치관은 그것 자체가 평가의 대상이 된다는 것과 가치관에 개인차(個人差)가 많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권태응의 <감자꽃>이 영원한 이유

안병욱(숭실대), 김형석(연세대) 전 교수와 더불어 ‘한국의 3대 철학자’로 불리는 김태길(서울대) 회장은 “가치관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3가지 척도(尺度)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치의 수명, 가치가 줄 수 있는 혜택의 범위와 크기, 수단으로서의 가치가 아닌 목적으로서의 가치 등이 그가 제시한 ‘가치관을 평가하기 위한 3가지 척도’의 목록들이다.

“다른 조건이 같을 경우에, 수명(壽命)이 오래 가는 것의 가치가 수명이 짧은 것의 가치보다 높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금언이 가장 적절한 사례가 될 터인데, 나에게는 이와 관련한 유년 시절의 추억이 있다. 외가 쪽으로 두 살 위의 6촌 형이 있었다. 제일고보(경기고 전신)의 소문난 수재였던 그는 자신이 신봉하던 사상 때문에 일제에 의해 강제로 투옥됐다가 폐결핵에 걸렸다. 31세의 나이에 요절한 그는 죽기 전에 <감자꽃>이라는 제목의 동시집 한 권을 남겼다. 농촌의 질박한 정서를 탁월하게 그려낸 그의 동시는 동요로도 만들어 불리어졌고, 그의 고향인 충주의 탄금대에는 동요 <감자꽃>을 새긴 노래비가 세워졌다.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권태응은 아직도 <감자꽃>으로 살아 있다.”

어디 그뿐인가. 충북작가회의는 1997년부터 매년 권태응 문학잔치를 열어 그의 문학정신을 기리고 있다. ‘자주 꽃 핀 건 자주 감자/파 보나 마나 자주 감자/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파 보나 마나 하얀 감자’(동시 ‘감자꽃’ 전문). 이 짧디짧은 동시를 표제로 한 동시집 <감자꽃>의 두께는 얇디얇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권태응은 영원히 우리 곁에 살아 있다.

“사람들 전체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혜택의 범위와 개인에게 돌아갈 수 있는 혜택의 크기도 중요한 척도이다. 혜택의 범위와 크기가 클수록 큰 가치가 되고, 작을수록 작은 가치가 된다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예술과 사상 등이 나누어 줄 수 있는 혜택의 범위는 매우 넓다. 사람이 지켜야 할 윤리를 설파한 공자의 유교 사상이 그렇고, 한없는 사랑이 마침내 인간을 구원할 것이라는 예수의 기독교 사상이 또한 그렇다. 반면에 현대인이 종교처럼 떠받들고 있는 돈과 집과 권력 등이 나누어 줄 수 있는 혜택의 범위는 생각보다 그리 넓지 않다. 예컨대 여기 100만원의 돈이 있다고 하자. 우선 이 돈을 한 사람이 가지고 있다면, 그 돈을 소유한 사람을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에게는 사실 아무런 혜택이 없다.”

‘수단으로서의 가치가 아닌 목적으로서의 가치’도 빼놓을 수 없는 척도이다. 예컨대 건강과 장수는 ‘목적으로서의 가치’에 해당한다는 것이 김 회장의 주장이다. 건강이 다른 무엇을 위한 수단이 되기도 하지만 건강하게 사는 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라는 말이다. 왜 건강하게 사느냐고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 반면에 의약과 의술은 수단일 뿐이지 목적은 아니다.

“그렇다면 한국인은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을까. 물론 한국인의 가치관이 어떻다고 일률적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우리가 언급할 수 있는 것은 한국인 대다수가 가지고 있는 일방적 경향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앞에서 설명한 3가지 척도를 동원해 한국인이 과연 올바른 가치관에 따라서 살고 있는지 살펴볼 수는 있다. 그러한 관점에서 살펴볼 때 한국인 대다수는 전체적으로 건전하지 못한 가치관에 따라서 살고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국인 대다수가 자신의 인생에서 무엇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마도 한국인 대다수는 소유의 극대화, 향락의 극대화, 권력의 극대화를 가장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결론적으로 그것은 올바른 가치관이 아니다.”

김 회장은 이 대목에서 개념의 재분류를 시도했다. 물질의 소유, 권력, 육체적 향락 등을 편의상 ‘외면적 가치’로, 예술적 창조, 심오한 학식 등을 ‘내면적 가치’로 분류한 것이다. 그는 “가치의 세계를 그렇게 두 진영으로 나눌 경우에 전자에 속하는 것들은 배타적 경쟁성이 강하지만 후자에 속하는 것들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고 말했다.

“실제로 외면적 가치 중의 하나인 재물은 수명이 오래 가지 못한다. 우리나라 속담에 ‘부자가 3대 가기 어렵다’는 말이 있다. 한 세대가 30년이니까 부자가 100년을 넘기기 쉽지 않다는 메시지이다. 실제로 나는 어린 시절 박씨네, 민씨네, 김씨네로 불리던 ‘조선의 3대 갑부’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보면, 3대 갑부 중 한 명인 화신백화점 주인 박씨네와 세도가였던 민씨네는 벌써 자취를 감추었고, 김씨네만 갑부로 남아 있다. 유일하게 살아남긴 했지만 김씨네도 현재 기준으로 재벌 10위 안에는 못 들어가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내면적 가치 중 하나인 예술적 창조는 오랜 기간 동안 많은 사람에게 혜택을 나누어 준다. 예컨대 베토벤의 고향곡은 아무리 나누어도 줄어들지 않는다.”

‘만인은 만인의 적’시대 끝내자

일정한 집단이 일정한 시기에 보유하고 있는 외면적 가치의 총량은 어쩔 수 없이 한계를 갖는다. 실제로 대한민국이 2008년 1월에 보유하고 있는 GDP와 생산력이 아무리 많다고 한들 무한할 수는 없는 법이다. 반면에 건강과 장수, 사랑과 우정, 고매한 인격, 예술적 창조 등 내면적 가치의 총량은 각자의 소질과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늘어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내면적 가치를 우위에 두고 인생을 영위한다면, 서로가 서로를 적대시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외면적 가치를 중심에 둔 사람들의 경쟁은 치열할 수밖에 없으며, 우리들의 인간관계는 ‘만인은 만인의 적’이라고 묘사한 홉스의 비극적 패러다임에서 조금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건강과 장수를 위해 각자가 노력만 잘 하면 100명도, 1000명도, 아니 수백만명이라도 모두 건강한 사람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하기에 달려 있고, 그 총량은 얼마든지 증대시킬 수 있다. 이러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인성교육을 거국적, 조직적, 장기적으로 실시해야 한다. 건전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의 세력이 늘어가는 나라에는 결코 절망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여의도통신=정지환 기자

김태길 회장의 이력서

▲ 서울대 철학과 졸업
▲ 미 존스홉킨스대 철학 박사
▲ 서울대 철학과 교수, 명예교수
▲ 한국철학회 회장
▲ 수필문우회 회장
▲ 도산사상연구회 회장
▲ 철학문화연구소 이사장
▲ 한국방송공사 이사장
▲ 대한민국학술원 부회장
▲ 우산육영회 이사장
▲ 심경문화재단 이사장
▲ 성숙한사회가꾸기모임 상임공동대표
상훈: 현대수필문학대상, 제32회 대한민국학술원상, 제6회 인촌상 외
저서: <새로운 천년을 바라보며>, <유교적 전통화 현대한국>, <삶이란 무엇인가>, <꿈이 있는 사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