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갓이 남도 유람길에 우연찮게 담양 땅을 지나게 됐다.

때는 정해년 가을, 뒷산 대밭에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냇가에서는 마을 어르신들을 모셔다놓고 경로잔치가 한창이었다.

삿갓이 지나면서 유심히 쳐다보니 이곳에는 신관사또와 육방관속을 비롯해 고을 유지들이 모두 모여 있는데 유독 퇴임 후 고향에서 기거하고 있는 전관사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삿갓이 의아해 뒤편에 모여 있는 백성들에게 연유를 묻자 한 백성이 주위를 조심스럽게 살피고는 삿갓에게 던지는 말이 “전관사또가 잔치에 나타나면 육방관속들이 경을 치니 잔치에 나올 수가 없소.”

곁에 있던 다른 백성도 한마디 거들었다. “아따 지난번 딴 고을 잔치 때 마을 젊은이들이 전관사또가 잔치에 참석했다고 소개했다가 동헌에 불려가 신관사또에게 혼쭐이 났다 그러드만. 그 고을 현령도 꽤나 혼이 났다고 그러든디. 그라고 어떤 동네는 말이여 아예 이방이 전통을 내려 현령한테 전관사또 소개하지 말라고 지시까지 했디야. 어디 그 뿐이간? 전관사또를 앞자리에 앉혀놨다고 현령을 불러 호통까지 쳤다는구먼.”

삿갓이 이 말을 듣고는 한바탕 크게 웃고나서 널찍한 화선지를 꺼내 한 문장 갈겨 던지고는 자리를 떴다.

“二十樹下三十客 四十家五十食 人間豈有七十事 不如歸家三十食”
(스무나무 아래 서러운 나그네가 망할놈의 집안에서 쉰밥을 먹네. 인간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으랴, 차라리 집으로 돌아가 설은 밥을 먹으리라.)

위 詩는 김삿갓이 방랑 중에 어느 부잣집 잔치에 갔다가 박대를 당하고 나오면서 지은 詩다. 유감스럽게도 우리 지역 경로잔치에서도 이와 유사한 일이 벌어져 뭇 백성들의 혀를 차게 하니 삿갓이 아닐지라도 한 소리 읊지 않을 수 없다.

경로잔치의 주인은 단연 어르신들이다. 그런데 막상 행사장을 가보면 주객이 전도된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행사의 주인인 어르신들을 모아놓고 식전행사랍시고 온갖 정치인들 소개하고 인사말을 시키느라 통상 한 시간을 허비하기 일쑤다. 도대체 누가 주인이고 누가 객인지 구분이 잘 안된다.

이렇다보니 부작용도 속출한다. 찾아오는 정치인들 소개를 안 할 수도 없고 해서 이런 저런 사람들 다 소개하다 보니 “왜 전직 군수를 소개했느냐”고 불려가 혼이 나는 등 주최 측을 난감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이 뿐만이 아니다. 모 지역 행사 때는 행정라인을 통해 아예 전직 군수에 대한 소개를 하지 말라는 압력도 있었다는 웃지 못 할 후문까지 전해진다.

진정으로 지역 어르신들을 공경하고 그분들의 노고를 위로하는 마음으로 행사장을 찾았다면 굳이 이러한 추태를 보일 이유가 없다. 누가 참석하면 어떻고 누구를 소개하면 어떠한가? 또 기왕 참석했다면 전직 군수에 대한 예우차원에서 당연히 소개하는 것이 옳지 아니한가? 현직 군수는 자리에서 물러나면 경로잔치에는 아예 코빼기도 내밀지 않겠다는 심산인지, 아니면 경로잔치를 무슨 정치행사로 착각하고 있는 것인지 도통 알 길이 없다.

흔히들 어르신들을 가리켜 지역의 元老라는 표현을 주저하지 않는다. 여기서 元老는 ‘으뜸이 되는 노인’을 일컫는다. 그러나 자칫 어르신들의 역할이 잘못되면 ‘元老’가 아닌 ‘怨老(원망스런 노인)’ 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그만큼 지역사회에서 차지하는 어르신들의 비중은 막중하다.
지금 우리지역은 화합과 상생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기다.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반성과 화해도 필요하고 범 군민적 합의로 상생을 이끌어 내야 할 중차대한 시점에 놓여있다. 이 일의 중심에 지역의 元老들이 자리해야 한다는 것은 두 말 할 나위가 없다.

상대가 누구이든 잘못된 행동은 과감히 꾸짖고 지역의 화합과 상생을 해치는 일이 없도록 권고와 훈계를 아끼지 않을 때 비로소 元老들이 존경받는 사회가 형성되는 것이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한명석(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