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을 여는 강연'은 "좋은 사람이 좋은 세상을 만듭니다"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있는 한국인간개발연구원(KHDI)의 조찬강연을 지상중계하는 코너입니다. KHDI가 지난 32년 동안 매주 목요일 오전 7시에 1513회(금주 기준)나 진행해 온 조찬강연은 국내 최다 회수를 기록하며 최고 권위의 강연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지난 8월 16일 롯데호텔 2층 에메랄드룸에서 민홍규 대한민국 국새제작단 단장이 ‘옥새에 담긴 장인정신과 숨겨진 비밀’이라는 주제로 강연한 내용을 정리한 이 기사가 독자들의 교양 쌓기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편집자주)

<한반도>. 강우석 감독이 제작한 영화의 제목이다. 2006년 7월 개봉한 이 블록버스터의 시놉시스는 이렇게 시작된다.

“남과 북이 통일을 약속하고 그 첫 상징인 경의선 철도 완전 개통식을 추진한다. 그러나 일본은 1907년 대한제국과의 조약을 근거로 개통식을 방해하고 한반도로 유입된 모든 기술과 자본을 철수하겠다며 대한민국 정부를 압박한다. '고종의 숨겨진 국새가 있다'는 주장으로 사학계의 이단아 취급을 받아 온 최민재 박사(조재현 분)는 국새를 찾는다면 일본의 억지 주장을 뒤엎을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의 주장을 믿게 된 대통령(안성기 분)은 일본 자위대가 동해상에 출현하자 비상계엄령을 선포함과 동시에 마침내 ‘국새발굴진상규명위원회’를 구성한다. 그런데 통일보다는 국가의 안정과 원만한 대일관계에 앞장서 온 국무총리(문성근 분)는 귀찮은 존재에 불과한 ‘국새’ 발굴을 막으려 한다.”

영화 <한반도>의 모티프는 ‘국새’(國璽)이다. 실제로 이 영화는 국새(일반적인 용어는 옥새)에 대한 일반 국민의 인식 범위를 매우 빠르고 넓게 확산시켰다. 그렇다면 옥새란 무엇이며 어떤 의미를 갖는가? 철저하게 베일에 싸여 있던 옥새의 비밀을 풀어낸 주인공인 민홍규 국새제작단 단장은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삼국유사> 첫 장에는 우리의 최초 고대 국가가 ‘하늘로부터 천부인(天符印) 3개를 받아 국가를 열었다’고 기록돼 있다. <삼국사기>에도 고구려 8대 신대왕 때 ‘중신들이 국새를 올렸다’는 기록이 전한다. 어디 그뿐인가. <조선왕조실록>에는 옥새가 곧 국가 주권의 상징이었음을 증명하는 역사적 장면들이 여기저기 숱하게 묘사돼 있다. 예컨대 인조반정 때 혁명파들이 거사를 하면서 가장 먼저 했던 일이 바로 연산군으로부터 옥새를 돌려받는 일이었다. 또한 다른 장인(匠人) 문화와 달리 ‘영새부’(전수자만 알고 있는 조선시대의 옥새 제작 비전)를 통한 옥새 제작 문화는 고도의 철학 정신을 요구하는 종합예술의 산물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옥새는 왕조시대를 상징하는 가장 정제되고 장엄한 보고(寶庫)이다.”

민 단장의 설명에 따르면, 조선시대의 옥새는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우선 국내적으로 왕권의 상징이자 행정기관의 서류 결재 양식이었다. 국왕이 베푸는 각종 국가 행사나 연회에서도 옥새는 빠지지 않고 등장하곤 했다. 또한 옥새는 외부적으로 조선이라는 국가를 대표하는 상징물이었다. 외교사절이 방문할 경우에 작성되는 외교문서에서 국왕의 신표로도 사용되었다.

“내가 옥새를 알게 된 것은 석불 정기호(1899~1989) 선생과의 만남에서 비롯됐다. 석불 선생은 고종 대의 옥새 전각장 황소산 선생의 맥을 잇는 근대 최초의 전각장으로 1948년 대한민국 최초의 국새를 만드신 주인공이다. 서예를 하셨던 할아버지의 소개로 16세의 중학생 때부터 석불 선생 문하에 입문해 옥새 전각을 배웠다. 그리고 석불 선생이 작고하기 1년 전인 1988년 옥새 전각 기능을 전수받은 뒤 본격적으로 전통 옥새 복원에 나섰다. 실제로 일제의 찬탈 등 여러 가지 요인으로 사라졌던 73과의 옥새 중에서 대한국새, 칙명지보, 황제지보 등 40여개의 옥새를 되살려낼 수 있었다. 정부(행정자치부)에서도 마침내 그 성과를 인정해 33명의 장인으로 구성된 국새제작단이 조직됐다.”

김서봉 한국전각학회 고문은 “옥새 전각장은 서예, 회화, 조각, 전각, 금속공예, 동양철학 등에 우수해야 하며, 이 모두를 다년간 수학하고 계승한 자라야 전수받을 수 있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옥새 전각이 종합예술의 산물이라는 이야기도 여기서 나온 것인데, 민 단장은 스승인 석불 선생이 유언처럼 들려준 이야기를 전달해주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옛날 중국에 어떤 훌륭한 재상이 있었는데, 그에게는 건장한 마부가 한 명 있었다. 이 마부가 어느 날 결혼한 자신의 부인에게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부인, 내가 오늘 재상 어른을 모시고 저잣거리를 지날 것이니 보러 오지 않겠소?’ 그는 모든 사람이 우러러보는 당대의 세도가를 모시고 있는, 그래서 많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며 호령하는 자신의 모습을 부인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다음날 부인은 남편이 예고한 시간에 저잣거리의 군중 속에 서 있었다. 잠시 후 저쪽에서 먼지를 일으키며 마차가 달려왔는데, 실제로 남편이 위풍당당하게 마차를 몰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재상께서 납신다! 모두 비켜라!’ 위세를 과시하는 커다란 목소리로 외치던 마부가 군중 속에서 부인을 발견하고는 호탕하게 웃었다.”

그날 저녁 마부는 곧바로 집으로 달려갔다. ‘당신과 결혼한 남편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이제는 알겠지.’ 마부는 자신을 경외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부인의 모습을 기대했다. 그러나 예상은 완전히 빚나갔다. 도리어 침울한 표정의 부인은 “이제는 당신과 헤어질 때가 됐다”는 말까지 던졌다. 당황한 마부가 아내에게 연유를 묻자 이런 답변이 돌아왔다.

“권력자의 호화로운 마차 위에 앉아서 호기를 부리는 당신의 모습을 보면서 솔직히 나는 창피함을 느꼈다.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당신 바로 뒤에는 늙은 재상이 힘없이 앉아 있었다. 외형적으로만 본다면, 당신은 당당했고 재상은 유약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비교해보면, 당신은 재상보다 얼마나 하찮은 사람인가. 육체적으로 당신보다 유약할지 모르지만 재상은 엄연한 당신의 상전이고, 허우대 멀쩡하고 강한 체력의 소유자인 당신은 그의 마차를 모는 마부에 불과하지 않은가. 사정이 그럴진대, 그 못난 마부의 부인인 나는 또 얼마나 더 하찮은 사람이란 말인가. 조금의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한 채 다른 사람의 권력에 기대어 사람들에게 길을 비키라고 안하무인으로 외치는 당신의 모습에 얼마나 실망했는지 모른다.”

부인의 서릿발 같은 지적을 받고 충격을 받았던 마부는 그날로부터 삶의 태도를 완전히 바꿨다. 삶의 태도를 바꾸자 행동이 변화했고, 그를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도 달라졌다. 무엇보다 먼저 가장 가까이 있던 재상이 마부의 변화를 눈치 챘다. 얼마 후 마부는 더 이상 마차를 몰지 않게 됐다. 재상의 천거로 대장부의 기개를 펼칠 수 있는 지위에 오른 것이다.

“석불 선생은 특히 마부의 부인이 던지는 메시지를 주목하라고 했다. 그것은 ‘군중 속에서 느끼는 고독’의 메시지였다. 저잣거리에서 마차를 모는 마부를 바라본 것은 부인 혼자가 아니었다. 거의 모든 군중이 마부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마부의 부인만이 유일하게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고, 도리어 허위의식(虛僞意識)을 읽어냈던 것이다. 스승은 여기까지 소개하신 뒤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진실로 군중 속에서 고독함을 느낄 때 너 자신의 자유와 본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역설적으로 생각해 보면, 고독하다는 것은 친구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주변에서 더 이상 배울 게 없다는 뜻이 아닐까? 요즘 유행하는 ‘블루오션’도 결국에는 ‘군중 속의 고독’에서 출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어서 민 단장은 “선생께선 고독의 너머에는 천진한 달관의 경지가 있다고 말씀해 주셨다”고 했다. “자신이 맑아지면 상대가 잘 보인다.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스승의 유언도 덧붙였다. 그러면서 그는 스승 석불 선생이 들려준 또 하나의 이야기를 소개했다.

“두 아이가 싸우고 있었다. 공자가 그들에게 왜 싸우느냐고 물었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두 아이는 해의 위치를 두고 일대 논전을 벌이고 있던 참이었다. 한 아이는 이른 아침에 솟아오르기 시작한 해가 더 가까이 있다고 주장했고, 다른 아이는 한낮에 중천에 떠 있는 해가 더 가까이 있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두 아이가 각각 제시하는 근거가 과연 그럴 듯했다. 한 아이는 ‘아침 해는 유난히 커 보인다. 가까이에 있으니 커 보이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다른 아이는 ‘한낮의 해가 가장 뜨겁다. 가까이에 있으니 뜨거운 것이 아니겠느냐’고 주장했다. 공자는 이렇게 같은 자연 현상을 두고서도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전혀 다르게 볼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달관의 경지에 이르면 싸우는 아이에게도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여의도통신=정지환 기자 ssal@ytongsin.com



민홍규 단장의 이력서

▲ 석불 정기호 문하에서 옥새 전각법 사사, 17년 만에 옥새 전각 전수 완료, 조선 옥새 전각장 전수자의 옥서(玉書) 받음
▲ 박정희, 노태우 대통령 개인 옥새 제작
▲ 고종대(高宗代) 소실 옥새 5과(대한국새 등) 복원
▲ 조선시대 국새 복원
▲ 국립중앙박물관 대한국새 복원 제작
전시회: 샌프란시스코 국제미술작가전, 전각문자조형(LAP ART) 중견작가 초대전, 국립전주박물관 특별기획 초대전, 부산시립박물관 특별기획 초대전 외
상훈: 옥새 전각-경기도 으뜸이(명장) 선정,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선정 미술부문 최우수상,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전통예술부문 올해의 예술상, 새 국새의 인문(글자체)과 인뉴(손잡이) 당선 외
저서: <옥새 전각 전수 어록>, 1, 2권, <옥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