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훈의 달을 맞아 담양의 처음이자 마지막 학도병이었던 서홍선 씨와 조규선 씨를 중심으로 행적을 돌이켜 조국애의 지표로 삼고 다시는 이 땅에 동족상잔의 비극이 되풀이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기사내용은 생존자의 증언에 의한 것임을 밝힙니다.(편집자)

1948년 49년. 홍선과 규선은 그동안의 체제를 반대하고 "세상을 한 번 뒤집어 보겠다"는 세력에 대응해 '학생연맹'을 꾸리며 이른바 '빨갱이 소탕'에 발 벗고 나선다. 광복 후 반탁운동을 주도했던 그들은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분연히 일어서 전선에 참가, 그 충혼을 다하게 된다.

출 정 식

▲ 학도특별훈련소 제2기 4반 기념촬영. 왼쪽 6번째가 서홍선.

학교에서 대대적인 출정식을 가진 후에도 각자 동네로 돌아가 가두행진에 나섰다. 읍 시가지에선 코흘리개 어린애부터 꾸부정 허리의 노인네까지 태극기를 흔들며 전장으로 떠나는 ‘용사’들을 환송했다.
군용트럭에 올라탄 ‘네 명의 학도병’들은 그렇게 ‘혈서지원’의 맹약을 지키기 위해 당시 전남병력이었던 국군11사단 26연대(현 육군 31사단 자리)로 향했다.

흔들리는 차안. 서홍선(당시 20세, 학생연맹 담양군지부 위원장·호국단장)과 조규선(당시 18세, 학생연맹 담양군지부 감찰부장·호국단원)의 머릿속엔 그동안의 일들이 하염없이 스쳐갔지만 처음부터 살아올 생각은 하지 않았다.

“우리 멋있게 죽자!”
“그래!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치는 것처럼 숭고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지원서를 학교(담양중, 현 담양교육청 자리)에 제출한 후 나흘 만의 일이었다. 규선은 혈서지원에도 “웃으면서 나아가는 담중용사”라고 적은 터라 이미 죽음에 달관해 있었다.
전장에 나가기 전부터 ‘호국군’에 몸담아온 홍선과 규선인지라 지니고 있는 건 오직 조국애 뿐. 그들에게 처음부터 살아 돌아올 생각은 없었다.

호국군은 당시 전국에 걸쳐 조직된 향토방위를 목적으로 하는 반(半)군사조직으로 민간인은 물론 학생들까지 부대편제에 넣었으며 각 지역의 모병과 훈련을 맡은 배속장교가 현직 선생이었던 관계로 나이어린 학생들도 꽤 있었다.
담양중학교는 이 호국군의 4중대로 임명받았으며 장성에 있는 중대본부의 지휘를 받았다.
호국군의 훈련과 모병을 담당하던 인물은 영어를 가르치던 김종곤 배속장교. 지휘관이 필요했던 이승만 정부는 이념성이 뛰어나고 건강한 선생을 차출, 육국본부에서 소정을 훈련을 거치게 한 후 소위에 임명, 다시 학교에서 호국군을 담당하게 했다.
드디어 며칠간 머물렀던 26연대 연병장을 뒤로 하게 됐다.

“잘들어라! 너희는 이 나라 조국수호의 위대한 사명을 띠고 순결하고도 고귀한 혈서지원으로 전투에 참가하게 됐다. 너희는 앞으로 2인 1조가 되어 항상 함께하게 된다.”

홍선은 고향에서부터 함께 온 두 살 어린 규선(당시 18세)과 한 조가 되었다.

“형 지금 어디로 가는 거지? 전북인 것 같은데 통 모르겠네…”
“내가 일을 당하면 너라도 이 총으로 끝까지 싸워야 한다. 알았지!”

전투에 참가하게 된 홍선과 규선의 손엔 자신들의 키만한 ‘38식 소총’ 한 정과 5발들이 탄창 3개가 든 탄띠 하나씩이 전부였다. 소속부대도 이름도 군번도 없었다.

▲ 38식소총과 99식 소총. 사진 위가 38식 소총이다.

전투에 배치된 후 같이 고향을 떠나온 박희구(당시 19세 추정)와 박길남(당시 19세 추정, 양각리 2구 사미정 거주)은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정읍이었다. ‘정읍전투’에 배치된 것이다.

정 읍 전 투

길섶 작은 숲에 새끼새 마냥 몸을 튼 두 학도병은 길넘이만 응시하고 있었다. 기다릴 것도 없이 “삐이익 삐이익 촤르륵 촤르륵” 인민군 전차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팅 팅 팅”

돌팔매질에 불과했던 두 학도병의 화력은 가지고 있던 30발의 탄약마저 떨어져 어찌할 바를 몰랐다. 뒤를 보니 어느새 병력들이 산속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중사나 고참병 뒤만 쫓아다니던 학도병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일단 다른 병력들처럼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숲 속에 모인 병사들은 이 박사에 대한 원망의 소리를 뱉어냈다.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우릴 인민군 전차막이로 쓰다니 이것은 인해전술로 며칠 버텨보겠다는 것 아닌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총알받이’로 내몰린 병사들은 자신들을 사지로 내 몬 자에 대한 원망의 목소리로 숲을 메웠다.
그 때 미군 쌕쌕이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위이-잉” 미군 폭격기였다.

“살았다! 살았어!”

지옥에서 벗어난 기쁨에 너나 할 것 없이 손을 흔들며
“저쪽이다! 저쪽에 인민군 전차가 있다!”

병사들은 사력을 다해 외쳤지만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미군의 오폭으로 얼마 남지 않았던 병력마저 완전 와해돼버린 것이다.
지휘관도 없고 싸울 탄환마저 없던 학도병들은 부대가 와해되자 인민군의 눈을 피해가며 사흘 밤을 걸어 집으로 향했다. 고향은 이미 인민군 손아귀에 점령된 지도 모르고.

담양에 도착하자마자 주둔하고 있던 인민군에 의해 체포된 홍선과 규선은 광주 동명동 '농장다리' 밑 형무소로 투옥됐다.

탈 옥

“아버지!”

홍선은 그 곳에서 부친인 서인현 씨와 동생 홍룡 씨를 만난다. 놀라움보단 '살아있어 고맙다'는 마음에 뜨거운 눈물만 한 없이 흘렀다.

1950년 7월 23일 저녁. 담양을 점령한 인민군은 당시 독립촉성위원회 군부위원장이었던 서인현 씨를 제일 먼저 체포하고 이후 당시 대한청년단 담양군단 선전부장이었던 국채동 씨, 국순걸(당시 금융조합 근무)씨, 국순호(수복 후 대한청년단부위원장)씨, 국승현(반탁청년운동 주동)씨 등을 체포, 약 2개월 동안 40여명에 달하는 담양사람들을 당시 ‘광주 농장다리 밑 형무소’에 가둔다.

당시 민족진영으로서 담양의 대표적 인물은 서인현(당시 독립촉성위원회군부위원장·민주당 군감찰위원장)씨, 김동호(대동병원 원장, 현 중앙공원 앞 동산병원 전신)씨, 전준만(당시 대한청년단장)씨로 우익계열의 이들 3인은 인민군들에겐 제1의 목표였다.

전쟁이 발발하자 김동호 씨는 경찰과 함께 부산피란길에 올라 목숨을 건졌으며 서인현 씨는 “잘 못한 것이 없으니 피란 떠날 이유가 없다.”며 꿋꿋이 버티다 인민군에 의해 투옥됐다. 그러나 전준만 씨는 인민군에 투항했음에도 불구하고 철수하던 인민군에 의해 전 가족 7명이 사살되는 끔찍한 일을 당하게 된다.(혹자에 의하면 재래식화장실 바닥에 숨겨둔 당시 6세의 막내아들은 살아남았다는 증언도 있음)

담양을 점령한 인민군은 ‘인민재판’이란 서슬 퍼런 인간사냥으로 반대파들을 하나하나 처단하기 시작한다 . 당시 재판 장소는 향교.
인민재판 1호로 지명된 서인현 씨의 집안사람들은 굴비 엮이듯 새끼줄에 엮여 끌려갔다.
재판 전 인민군 대좌는 인현 씨의 한 살 베기 손자가 시끄럽게 운다는 이유로 2m높이 난간에서 축구공 차듯 발로 차 아이를 떨어뜨린다.

하루 종일 계속된 몽둥이질.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못하고 새끼줄에 엮인 온 가족은 시장과 마을을 돌며 주리돌림 당한 후 남자들은 구속된다. 그 와중에도 일제시대 항일운동에 앞장섰다는 전력이 감안돼 목숨만은 건졌으니 다행이었다.

그러나 서인현 씨의 여동생이 시집 간 국길현씨 집안은 더 처참한 일을 당하게 된다. 인현씨의 동생 서삼현 씨는 총살당하는 비운을 겪게 된 것이다.

수감된 후 밖에선 인민군에 의한 도륙이 한창인 가운데 바깥세상을 알 수 없던 서인현 씨 일행들은 더 초조해졌다. 형무소 내에서도 국채동, 서홍룡, 조규선 씨만 같이 있게 되고 모두 뿔뿔히 흩어져 지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서인현 씨가 수감된 지 두 달여 만에 홍선이 수감된 지 20여일 만에 이내 사건은 벌어진다.

간수를 맡은 인민군 병사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인민군이 후퇴하기 시작한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돌기 시작하더니 간수들은 수감자들을 한 명 한 명 데리고 나갔다. 총살이었다. 이유도 없다. 순번도 없이 판결도 없이 무조건 눈에 걸리는 데로 한 명씩 데리고 나갔다. 그날이 9월 20일 경. 400여명의 수감자 중 200여명이 사살됐다.

당시 간수로 있던 사람들은 주로 광주나 나주사람들이었다. 이들은 후환을 없애기 위해 자신을 아는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한 것이다. 다행히 간수 중엔 담양사람이 없어 담양사람들이 몰살당하는 화는 면했으나 40여 명 중 10여명은 희생됐다.

그때였다. “펑 펑 펑” 굉음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미군의 공습이었다. 미군 폭격기가 광주지역을 탈환하기 위해 인민군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그 때 광주 농장다리 옆 형무소에서 옥바라지를 하고 있던 서인현 씨와 조규선 씨의 가족들이 형무소 밖 담장에서 소리치기 시작했다.

“미군이다! 미군이다! 미군이 오고 있다!”

미군이 진군하고 있다는 소리에 간수들이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투옥됐던 서인현 씨의 일행은 다시없는 기회라 생각하고 탈출을 시작했다. 목숨을 건 탈출이었다. 밖에선 이미 서인현씨의 처 국순봉씨와 딸 정순씨 조규선씨의 어머니 추옥임 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여보! 미군은 없어요! 사람들이 기름통에 불을 지르자 그 터지는 소리가 꼭 공습소리 같아 ‘미군이다’고 소리 친 것에요! 어서 피하세요”
“여보!”
“어머니!”
“얘기 할 시간이 없어요! 빨리 피하세요!”

서인현씨와 홍선, 규선은 친분이 있던 계림동 중국집 지하 식재료 창고로 몰래 몸을 숨겼다.
사람들에게 속은 인민군은 더 혈안이 됐다. 서울은 9월 28일에 수복됐으나 광주지역은 아직까지 인민군 잔당이 활개를 치고 있을 때였다. 하얀 얼굴에 수척한 사람은 묻지도 않고 그 자리에서 총살해 버렸다. 사람 목숨이 말 그대로 파리보다 못한 때였다.

계림동 중국집에 몸을 피하고 있던 서인현 씨의 일행은 일주일 정도 지나 드디어 아군 부대가 광주에 입성하자 바깥공기를 마시게 된다. 지옥에서 돌아온 것이다.

돌아온 담양

9월 28일 담양이 다시 수복됐다. 광주를 떠나온 서인현씨 일행은 고서에서 하룻밤을 묵고 시체들 사이를 걸어 담양에 도착한다.
다시 돌아온 담양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몇 명이 어떻게 죽었는지 파악할 수도 파악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홍선과 규선은 담양에 오자마자 담양에 진주하게 된 경찰병력의 서장(당시 서장 한금석) 연락병으로 채용됐다.

“띠보놈이 얼마나 죽였는지 모르겠네”
“인간백정이야 인간백정!”

띠보(떼보)는 남의 집 잡일로 연명하던 자로 인민군이 마을에 들자 그들 앞잡이가 돼 사람들 처형에 앞장섰다. (증언에 의하면 띠보는 "한명만 더 죽이면 100명 채운다"는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하고 다닐 정도였으며 그 후로도 살육은 계속됐다고 한다) 인민군이 철수하자 사람들의 눈을 피해 가마골로 도망쳤으나 국군 20연대의 토벌작전에 의해 생포됐다.

당시 담양경찰서 김수곤 수사계장은 담양청년단배속장교 국채동 씨에게 연락한다.

“국형! 띠보 놈을 잡았소!”

국채동 씨 앞에 있는 띠보는 몽둥이로 흠씬 두들겨 맞은 터라 온 몸이 부어있었다.

“채동씨! 제발 목숨만을 살려주소!”

그러나 띠보는 하루 후 담양경찰서에서 즉결처형 당한다.
얼마지나 “다시 전세가 역전돼 아군이 밀린다.”라는 말을 서인현 씨는 듣게 된다.

“상황이 호전 될 때까지 몸을 피하거라. 내 여수에는 기별을 넣어 놓았으니 잠잠해질 때까지 있다가 상황이 악화되면 다시 제주도로 피하거라!”
“아버지! 어머니랑 누님, 어린동생들은 어떡하고 저만 피합니까!”
“넌 놈들의 제1표적이다. 그만큼 넌 꼭 살아야 한다.”

홍선씨와 유모씨 그리고 장일환씨는 여수로 피신했다. 여수는 남단으로 장일환씨의 형인 장문환씨가 정보대 요원으로 있어 그나마 안전한 곳이었다. 전세가 다시 안정되자 피신해 있던 홍선의 일행은 다시 담양으로 돌아왔다. 당시 담양에는 국군 11사단 20연대(연대장 박기병 대령)가 주둔하고 있었다.

“너 20연대 중대장에게 시집간다며 사실이니?”
“… …”

학생연맹 여성조직부장을 맡았던 유 모씨는 매사에 활발하고 다부진 면이 있는데다 예쁜 외모였다. 당시 전권을 쥐고 있던 국군의 중대장(소위)이 청혼을 한 바에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육군보병학교

▲ 육군보병학교 학생연대 제1대 화랑회 창설 기념촬영. 가운데 줄 맨 왼쪽이 서홍선.


“규선아! 나 육군보병학교로 간다!”
“형! 학생연맹 활동으로도 얼마든지 싸울 수 있어!”
“너도 안주하지 말고 나가 싸워라!”

이후 홍선은 육군사관학교 전신인 육군보병학교로 규선은 헌병학교로 입학하게 된다.
사지(死地)에서 살아 돌아 온 그들에게도 현실은 냉혹했다. 전쟁이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들의 자아(自我)를 찾는 길은 다시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로 다시 돌아가는 길 뿐이었다.
휴가 나온 홍선은 규선을 만난다.

“그 중대장보다 먼저 진급하려면 최전방으로 가는 길밖엔 없다”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
“나 이미 수색중대장으로 지원했다. 죽더라도 꼭 그 놈보다 먼저 진급해야겠어!”
“규선이 넌 어떻니?”
“난 경찰에서 활동하려고 빨치산 놈들 잡는데는 경찰이 더 빠르겠어!”

▲ 휴가나온 서홍선은 조규선에게 최전방 수색중대장으로 지원한 것을 알리고 마지막 기념촬영을 하게된다. 뒤줄 왼쪽이 조규선 앞줄 오른쪽이 서홍선.

이후 광주경찰학교(현 광주충장로 광주학생회관 자리)에서 한 달간의 짧은 훈련을 받은 규선은 순천경찰서로 발령, 서남지구 전투경찰대 순경으로 3연대 1대대 1중대에서 근무하게 된다.
이후 조규선씨는 빨치산의 대대적인 근거지였던 가마골 전투에 참가했으며 12년 동안 더 경찰에 재직한다. 현재 그는 담양읍에 거주하고 있으며 일흔 고령의 나이에도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다.

홍선은 그의 뜻대로 육군 23연대 수색중대장이 돼 강원도 금화 연동지구에서 적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충혼을 다한다. 홍선의 가족에게 돌아온 건 이름과 118255 군번이 적힌 전사통지서 뿐.

“그 똑똑했던 내 아들! 내 아들 시신조차 찾지 못하다니!”
“아니다! 뭔가 잘 못 됐다!”
“어딘가에 살아있다! 분명 살아있어!”

52년이 지난 지금 20살 푸른 나이에 이름도 군번도 없는 학도병부터 최전방 수색중대장까지 짧지만 치열한 삶을 살았던 그는 아직도 우리 곁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서영준 記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