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을 여는 강연'은 "좋은 사람이 좋은 세상을 만듭니다"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있는 한국인간개발연구원(KHDI)의 조찬강연을 지상중계하는 코너입니다. KHDI가 지난 32년 동안 매주 목요일 오전 7시에 1499회(금주 기준)나 진행해 온 조찬강연은 국내 최다 회수를 기록하며 최고 권위의 강연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지난 4월 26일 롯데호텔 3층 사파이어볼룸에서 권영걸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학장이 ‘색채와 디자인 비즈니스’라는 주제로 강연한 내용을 정리한 이 기사가 독자들의 교양 쌓기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편집자주)

“문화의 시대, 영상의 시대, 속도의 시대…. 21세기를 지칭하는 말들이다. 실제로 세상을 바꾸는 에너지는 정치에서 문화로, 활자에서 영상으로 그 권력의 중심이 급격히 이동되고 있다. 디지털혁명과 더불어 찾아온 속도의 시대도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감히 21세기를 ‘색채의 시대’라고 부르고 싶다.”

한국색채학회 명예회장, 한국홀로그램작가협회 회장, 국회 공공디자인학회 공동대표 등을 맡고 있는 권영걸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학장은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그렇다면 최근 오세훈 서울시장에 의해 디자인총괄본부장(부시장급)에 발탁된 권 학장이 21세기를 색채의 시대로 규정하는 근거는 무엇일까.

“이제까지 색채는 종속변수였으나 독립변수가 됐다. 실제로 색(色)이라는 매체(媒體)와 매질(媒質)은 지구 어디에나 편재해 있다. 석유를 비롯한 화석연료처럼 고갈될 염려도 없고, 물처럼 오염의 위기에 빠질 위험도 없다. 그러나 색이라고 해서 항상 고정돼 있는 것은 아니다. 색에 대한 지각 현상은 나라, 지역, 사람에 따라서 모두 다를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색채상징주의’라고 부른다. 실제로 에스키모는 흰색과 관련한 형용사를 매우 많이 사용한다. 마찬가지로 사막 지역에서는 황갈색, 초원 지역에서는 녹색 계통의 언어가 상대적으로 발달해 있다. 문제는 그 대신 다른 색채에 대한 언어는 결핍돼 있다는 점이다. 선진국일수록 ‘컬러 스펙트럼’이 매우 다양하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색채상징주의에 따르면, 색채에 대한 인간의 생각은 환경의 산물이다. 그 사람이 살아가는 자연적·사회적 조건에 따라서 색채에 대한 지각 현상이 영향을 받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색채에 대한 인간의 생각이 변화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색채가 인간이 꿈꾸는 세상을 향한 희원(希願)의 산물이기도 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산업혁명이 인간에게 절대적인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란 믿음이 붕괴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부터다. 그리고 그 연장선 위에서 1979년 ‘녹색당’이 독일에서 창당됐다. 특정 색깔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한 최초의 정당이 등장한 것이다. 1980년대로 들어서면서 산성비, 지구 온난화, 오존층 파괴 등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하면서 아름다운 자연이나 무공해를 강조하는 광고도 호소력을 얻기 시작했다. 1992년 ‘지속가능한 개발’로 요약되는 리우선언이 발표된 것은 필연적 귀결이었다. ‘녹색사상’이 21세기 지구촌을 대표하는 사상으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그린(녹색)은 중세 이후 수백 년 동안 서구에서 악을 상징하는 색채였다. 하지만 시대적 변화가 특정 색채에 대한 지독한 편견을 사라지게 했다.”

서구 영화에 등장하는 ‘비호감’ 인물인 헐크와 슈렉의 피부 색깔 설정에서 알 수 있듯이, 자연을 상징하는 녹색은 도리어 서구에서 악령의 색채로 통했다. 권 학장의 설명에 따르면, 그것은 중세의 미개(未開)한 지리적 환경의 영향을 받은 바 크다. 각자 고립돼 있던 마을을 벗어나면 만나게 되는 울창한 숲은 산적과 맹수의 은신처였고, 당연히 숲의 색깔인 녹색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여기에다 종교, 인종, 정치의 문제까지 중첩된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기독교와 화해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던 이슬람의 상징색이 바로 녹색이었던 것이다. 마호메트의 터번이 바로 녹색이었는데, 적지 않은 아랍국의 국기에 녹색이 등장하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서구에서 녹색이 자연의 색으로 복권된 것은 의미심장하다. 실제로 많은 국가와 기업들이 역동적으로 색채를 마케팅에 활용하고 있다. 주요한 계기가 주어질 때마다 국가 구성원을 하나로 엮어내는 프랑스의 삼색기가 대표적이다. 왕족이 결혼하면 5가지 기념 색을 선정해 발표하는 일본도 빼놓을 수 없다. 샤넬이 골드를, 타임이 레드를, 내셔널지오그래픽이 그린을, 슈피겔이 주황을 고집하는 이유도 이런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이른바 ‘브랜드 컬러’에 대한 설명이다. 실제로 색채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기업이 낭패를 본 경우도 있다고 권 학장은 소개했다. 맥도날드가 점포 앞에 세워 놓는 하얀 얼굴의 상징 인형을 중국에서도 그대로 활용했다가 소비자의 반발을 부른 것이 대표적 사례인데, 중국에서 흰색은 죽음과 슬픔을 의미한다.

“영국 BBC가 제작한 ‘텔레토비’의 주인공들이 왜 4개의 색채를 가지고 있는지, 한국 축구의 대표팀 유니폼과 응원단 티셔츠가 왜 붉은 색깔로 선정됐는지, 나이키가 왜 상표 색깔의 선택권을 소비자에게 넘겨주는 제도를 도입했는지, 그 행간의 진실을 읽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색채의 공공성이다. 사실 모든 디자인은 공공성이 전제돼 있는데, 여기서 핵심적인 요소가 바로 색채라고 할 수 있다. 색채가 던지는 메시지를 정확히 읽어내는 개인, 기업, 국가가 경쟁에서 이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보다 높은 삶의 질을 누릴 수 있다.” /정지환 기자

권영걸 학장의 이력서

▲ 서울대 응용미술학과 졸업
▲ 서울대 환경대학원 환경조경과
▲ 미 UCLA 디자인학 석사
▲ 고려대 건축공학과 공학박사
▲ 서울대 미대 디자인학부 교수
▲ 서울대 조형연구소 소장
▲ (사)한국색채학회 명예회장
▲ 컬러엑스포 2004, 2005, 2006 대회장
▲ 한국홀로그램작가협회 회장
▲ 국회 공공디자인문화포럼 공동대표
▲ (사)한국공공디자인학회 회장

저서: 공간디자인16강, 색채와 디자인 비즈니스, 한중일의 공간조영, 색색가지 세상, 이제는 색이다, 색이 만드는 세상, 기업·디자인·성공, 성공하는 기업의 컬러 마케팅 외